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세대 여배우 트로이카 (문단 편집) === [[김지미]] === 김지미는 나이는 트로이카들과 별다른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 김지미는 1940년 생, 윤정희, 남정임, 문희는 각자 1944년, 1945년, 1947년 생이다.] 일찍 데뷔하여(1957년 데뷔) 나이차이가 큰 선배들과 공연(김진규, 최무룡, 신영균 등)하거나 경쟁(최은희, 문정숙, 주증녀, [[도금봉]] 등)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른 결혼(1958년 결혼)으로 인하여 20대 초부터 노역을 맡기 시작했다. 이후 치열하게 경쟁하던 엄앵란의 결혼과 최은희의 하락으로 원톱으로 나설 수 있었으나 트로이카의 탄생으로 주춤하게 된다. 이후 김지미는 트로이카와 공연에 있어 서브 주연을 맡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이들의 엄마 역할로도 나오게 되었다. 한 해에 200여 편 이상 나오던 1960년대 후반, 김지미 역시 트로이카와 공연을 피할 수 없게 되었는데 문희나 남정임과 같이 공연할 경우 대부분 주인공으로 나섰지만 이미지가 비슷하다고 여겨진 윤정희와의 공연에서는 주로 서브 주연 심지어 조연으로 나오는 경우가 있었고 후일 1971년 무녀도 주인공 파동과 1975년 내일은 진실 출연료 경쟁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또한 당시 인기의 척도로 불리던 청룡영화상 인기상 수상 역시 트로이카의 등장으로 인해 밀리게 되는데 1967년은 수상했으나[* 문희가 완전히 각광받기 전] 1969, 1970년은 트로이카 전원이 독식하는 바람에 수상하지 못했고[* 단 1969년에 주춤하기 시작한 남정임 대신 1970년 백상예술대상 인기상을 수상], 1971년 남정임의 은퇴로 그 공백을 채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1971년 남정임과 문희의 결혼으로 1세대 트로이카가 완전히 붕괴되면서 다시 빛을 볼 수 있었고, 1973년 윤정희의 유학으로 인하여 이전만큼은 못해도 톱 여배우로서의 위치를 차지하며 1974년, 1975년 2년 연속 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과 1974년 백상예술대상 여우주연상, 1975년 파나마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80년대에도 제작자로 진로가 변경되었지만 배우활동과 겸하여 활발히 활동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